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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우하우스 정신 (Bauhaus spirit)
    La ; Landscape/건축 & 조경 2020. 9. 8. 14:35

    2019년에 100주년을 맞는 "바우하우스", 다큐멘터리로도 나왔다. 나는 한적한 금요일 밤에 맥주 한잔과 함께 유튜브 스트리밍으로 시청했다. 다 보고 나서 어딘가 찜찜했다. 바우하우스의 배경지식이 있어야 내용이해가 가능하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개가 너무 뒤죽박죽이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정리를 해보고 싶어졌다.

    Bauhaus spirit 원작 포스터

     

    1919년 독일의 소도시 바이마르에 '바우하우스_Bauhaus'라는 이름의 미술공예학교가 문을 열었다. 기존의 모든 틀을 깨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겠다는 급진적 의지로 설립된 개혁학교였다. 올해 2019년, 설립 100주년을 맞아 독일에선 '바우하우스 365일'을 모토로 내걸고 일년 내내 잔치가 계획되어 있다. 데사우Dessau에선 바우하우스 박물관을 새로 짓고 베를린에선 증축하고 있다. 건축과 디자인의 역사에서 바우하우스가 차지하는 의미가 컷던 것은 이해하지만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다. 매사에 과장이 없는 독일인들이 왜 이 난리인가 그것이 궁금하다.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고정희 글 옮김>

     


     

     

    20C 유럽의 시대 상황

    모던(Modern)이라고 불리우는 디자인 양식을 이해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태생한 시대를 알아야만 한다. 20세기 초반, 당시에는 새로운 미래를 열어 줄 것은 기존의 전통적인 생산방식이 아니라 산업적인 대량생산 방식이란 것이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현실이 되었다. 기능에 충실한 "합목적적" 특성들을 경험마면서, 미술가들은 역사적 전통양식의 과도하고 불필요한 장식 일체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길 만큼 미적 혁신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로부터 모든 과거의 역사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전통과 대립하며 끊임없이 변혁을 추구하는 급진적 시대정신이 지배하는, "현대(Modern)"라는 시대가 개막되었다. 

     

    1920년대 독일

    제 1차 세계대전 전후의 극심했던 사회적 혼란은 1920년대에 점차 사라지고, 아방가르드 미술운동 역시 종말을 고했다. 그 자리에 제국주의가 지배적이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신고전주의를 지향하며 고전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였고, 제국주의가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다양한 세계관을 어느 정도 자유롭게 펼쳐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극심한 사회적 분열과 경제적 빈곤이 대부분 사람들의 일상을 좌우했다. 생존 위기 상황에 처한 노동자 가정과 극빈층은 당시 현대적이고 위생적인 생활양식을 누리기 시작한 계층과는 전혀 다른 양극을 이루었다. 그래서 바이마르 시대는 이러한 사뢰적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에서부터 미술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 영역에서 강한 반목과 대립이 난립한 시기였다. 

     

    독일공작연맹과 바우하우스 안팎의 미술가들은 테슈테일(De Stijl) 운동에서 직각의 형태구조로 도입했던 입체주의의 조형언어를 받아들였다. 그 신 조형주의(Neo-Plaxticism)의 각진 형태와 어둡고 강한 선 등은 타이포그래피에서부터 건물과 가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미술 분야로 퍼져나갔다. 

     

    국제양식, 기능주의, 모더니즘은 같은 개념의 서로 다른 용어 

    국제양식 The International Style = 기능주의 Functionalism = 모더니즘 Modernism

    영미권에서는 '국제주의'를 '기능주의'와 동일시하고, '모더니즘'으로 정의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독일 공작연맹과 그로피우스, 미스 판 데어 로에의 바우하우스를 그 전형으로 꼽았다. 

     

     

    비판

    (나중에 다룰 기회가 있겠지만) "기능주의"는 1950년대부터 독일을 비롯한 전 세계로 확산됨으로써, 일상의 획일화 문제를 심각하게 야기했다. 그 결과, 국제양식과 기능주의를 획일화의 주범으로서, 바우하우스와 신건축을 그 근원으로 강하게 비판하면서 국제양식과 기능주의를 극복하고자 한 포스트 모던 운동이 일어났다. 

     

    -이병종, 논문 다수 발췌 및 재가공


     

     

    우리는 지금,

     

    21세기도 벌써 20년 가까이 지나가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한물간 20세기 바우하우스와 모더니즘을 다시 꺼내볼 필요가 있을까? 21세기를 제2의 모더니즘 시대라고도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1990년대부터 디지털 혁명과 함께 제 2의 모더니즘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세계화의 시대라고 그럴듯하게 말하지만 알고 보면 혼돈의 시대다. 우리는 지금 스마트폰이 지휘하는 정보의 대홍수에 떠밀려가고 있다. 목적지가 어딘지 누가 알까?

     

    혹시 비전이 필요하지 않은지? 돌파구를 찾고 싶지 않은지? 갈피를 못 잡아 머릿속이 어수선하지 않은지? 그렇다면 바우하우스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헐벗고 굶주린 상태에서 유토피아적 에너지가 폭발했던 백 년 전의 이야기. 이제 그 에너지가 점차 고갈되어 가고 있는데,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원천이 우리에겐 없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략)바우하우스 입학생 하나가 발터 그로피우스 학장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여기서 건축사史도 배우나요?" 학장님이 답하기를 "바우하우스에서 역사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과거와의 완전한 결별. 바우하우스의 설립 취지 중 하나다. 바우하우스 팀들이 근본 없이 막된 인간들이어서 전통을 무시한 것이 아니다. '과거에 너무나 된통 당하고 실망을 넘어 절망'했던 까닭에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이다. 이렇게 전통과 결별하고 나면 춥고 외로울 수도 있으나 새로 시작한다는 벅참도 있다. 배수진을 쳤으니 앞으로 나가야 했다. 바우하우스가 설립됐던 1919년에 독일은 황제국과 결별하고 공화국을 세웠다. 이보다 더 새로운 출발이 있을까? 민주주의, 평등한 세상, 자유! 젊은 심장이 크게 박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당시 먹을 것이 없어 학생들 대부분이 굶주렸다. 그로피우스 학장이 시와 의논하여 식당을 차리고 무료급식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마저도 멀건 수프와 샐러드 정도였으므로 먹자마자 바로 배가 고파졌다고 한다. 그래서 학생들은 식탁과 의자를 벽으로 밀고 춤을 췄다. 춤으로 허기를 이기자는 거였는데 그 때 사진을 보면 굶어서 궹한 모습보다도 들 든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바우하우스의 축제와 재즈 밴드는 전설적이었다고 한다. 허구한 날 파티가 벌어져 바이마르 시민들은 그들이 내놓는 이상스러운 디자인 보다 요란한 행적을 더 두려워 했단다.  - 고정희 글

     

    바우하우스 100주년 기념 포스터에 나온 "굶주리면서도 춤추는 바우하우스 학생들"  ⓒBauhauskooperation.de

     

    영화에서는

    바우하우스의 기능주의가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여전히 20세기 유럽의 빈민들과 노동자 계급의 모습을 한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존재하며, 그런 지역에는 여전히 유효한 솔루션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이 후에 다룰 주제는,

     "지역주의", 그 중에서도 "재생적 지역주의"를 다루고 싶다. 모더니즘을 비판하며 나온 사조들 중 하나로써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더 필요하신 분은

    ※ 「1920년대 국제양식과 기능주의」 이병종, 논문 찾아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 참고했던 링크

    inmun360.culture.go.kr/content/357.do?mode=view&page=&cid=2365393

     

    ※ 고정희의 <써드 스페이스 베를린> 온라인 사이트

    thirdspace-berlin.com/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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